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림사지 오층석탑 (문단 편집) == 명문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정림사지 대당평일백제비 탑본 국립중앙박물관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fff ''' 대당평백제국비명 '''}}} || 이 탑이 평제탑, 평제비라 불리는 이유는 탑의 초층 탑신 전체 면(4면)에 [[소정방]]이 전승기공문을 새겼기 때문이다. 명문의 정확한 이름은 "대당평백제국비명(大唐平百濟國碑銘)"이며 전체적인 형식은 1면 24행, 2면 29행, 3면 28행, 4면 36행으로 총 117행에 각 행은 16, 18자로 이루어져 총 2126자나 된다. 제작 연도와 제작자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록해두었는데 [[고종(당)|현경]] 5년(660년, 고구려 [[보장왕]] 19년, 신라 [[무열왕]] 7년) 8월 15일,[* 현경오년세재경신팔월기사삭십오일계미건(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) 탁본 우측 하단에서 볼 수 있다.] 당나라의 권회소(權懷素)가 글을 썼다. 내용은 [[당나라]]가 백제 정벌에 나선 이유, 출정한 당군의 편성, 정벌에 참여한 장수들의 공적과 그 칭송, [[고종(당)|황제]]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[[사비성]]을 함락시켜 [[의자왕]], 태자 [[부여융]], 왕자 [[부여효]] 외 13명과 대좌평 사택천복, 국변성 등 7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내용 등을 기록했다. 또한 백제를 접수한 후 행정 구역 정리를 한 내용도 있는데 5[[도독]]부, 37주, 250현을 두고 호 24만, 인구 620만을 편호로 정리하고 오랑캐(백제)의 풍속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. 번역 전문은 이곳을 참조. [[http://db.history.go.kr/item/level.do?sort=levelId&dir=ASC&start=1&limit=50&page=1&pre_page=1&setId=-1&totalCount=0&prevPage=0&prevLimit=&itemId=gskh&types=&synonym=off&chinessChar=on&brokerPagingInfo=&levelId=gskh_010_0010_0030_0030&position=-1|#]] 왜 굳이 불탑에다가 이런 글을 새겼냐면 의자왕을 붙잡은 것이 660년 7월 18일이고 이 명문을 새긴 것이 8월 15일, 당군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한 것이 9월 3일이었다. 비석을 새로 만들 큰 돌을 캐서 연마하고 글씨를 새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, 대신 백제의 수도 사비 시가지 한복판에 이미 크게 서 있고 여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이 탑에 글씨만 새긴 것이다. 실제로 명문을 보면 처음엔 글씨체가 반듯하다가 뒤로 갈수록 고르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. 원래는 명문 글씨에 붉은색 물감칠을 했지만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물감이 바래서 붉은색은 아주 미세하게만 남아 있다. [[정약용]]이 [[청양]]의 관리로 부임했을 때 가까운 부여에 탐방을 갔다가 이 비문을 보고 그 내용을 깐 시를 남기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